7卷4冊 : 四周雙邊 半郭 20 x 16cm, 有界, 1行21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26 x 18 cm.
조선 중기의 학자인정칙의 시문집이다. 할아버지는 정두(鄭枓), 아버지는 매창 정사신, 어머 니는 영춘 이씨로 관찰사 이광준(李光俊)의 딸이다. 경상북도안동시 와룡면 태리에서 태어났 다. 유년 시절 가정에서 수업한 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외삼촌 이민환(李民寏)을 따라 문예를익혔다. 광해군조에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독서와 문장 수련에 힘쓰다 인조반정 이후인 1627(인조 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 후로 15차례나 대과에 응시하여 향시에 2번 씩이나 장원했으나 예부시(禮部試)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1637(인조 15)년 청나라와 강화한 후 이듬해 장릉(章陵) 참봉에 제수되자 사은숙배한 뒤 대명절의를 부르짖고 바로 귀향하여 남간정(南磵亭)을 지어 그 안에 작은 방을 소와(笑窩)라 이름 짓고 은거에 들어갔다. 만년인 1654년 무렵 뜻을 이루지 못해 재차 영주 남쪽으로 이거하였다. 학가산(鶴駕山) 북쪽 지맥이 중간에 끊어졌다 다시 솟아올라 이루어진 달미산(고학) 우천(愚川)이란 곳에 우천정(愚川亭)를짓고 우천노인(愚川老人)이라 스스로를 불렀다. 또 도연명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모방 하여 「우천은자전(愚川隱者傳)」을 지어 은둔할 뜻을 보이고 글과 글씨 쓰는 것으로 스스로 즐겼다. 당시에 10리 떨어져 생활하고 있던 학사 김응조와 도의지교를 맺어 가장 가깝게 교유하였으며,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의 부탁으로 『소미통감(少微通鑑)』을 개정하다가 끝맺 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이 문집은 1833(순조 33)년후손 내성(來成)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장편시인 「민한구 점(悶旱口占)」과 「홍수탄(洪水嘆)」은 하늘이 주는 천재는 인간이 미워서 내리는 것이 아니고인간 스스로의 불찰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내리는 벌이므로, 그것을거울삼아 천재가 있을 때마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숙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오잠(五箴)」은 수양지침으로 말을 삼가고, 욕망을 억제하며, 교제를 가려서 하고, 사치하지 말며, 명예를 탐하지 말고 오직 자기수양에만 힘쓰라는 격언이다. 「진폐소(陳弊疏)」는경상좌도에서 시정하여야 할 사항,즉병영의 이전, 군병의 점검, 무관등용제도의 개선을 요구한것으로, 지방행정의 실태 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의송궁문(擬送窮文)」은 한유의 「송궁문」을 모방하여 지은 장편의 글로 그의뛰어난 문장력과 기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이 밖에도 국상 중에는 자기의 친상을 당해도 그복을 입을 수 없다고 말한 「군복재신불복사복(君服 在身不服私服)」,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을 읽은 뒤 소감을 밝힌 「독장자(讀莊子)」, 기묘사화를야사로 쓴 책을 읽고 난 다음 정사와의 차이점을 야사가 정사보다 오히려 신빙성이 높다고 한 「독해동야언기묘사(讀海東野言己卯事)」 등이 있다.또한 시사(時事)를 말하다가 죄를받은 일을 논한「논시사언죄(論時事言罪)」와 입산금지의 폐단을 논한 「논금산지폐(論禁山之廢)」 등이 있다.